(출처명: 배보람. 2026. 「기후위기를 살아내고 대응하는 도시: 한국에서 도넛도시가 필요한 이유」. 이민주·이윤석·배보람·진상현·이현성·오현순. 『함께 회복력: 위기의 시대, 공존을 설계하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엮음.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65-93쪽)
목차
- 기후위기에 대응하면서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까?
- 사회적 기초를 지키며 생태적 한계 안에 사는 도넛 도시
- 도넛없이 도넛을 만들어내는 한국의 도시들
- 도넛 모델을 통해 지역의 전환을 상상하기
1. 기후위기에 대응하면서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재난 불평등』이라는 책을 쓴 존 머터는 “지진이 아닌 건물이 사람을 죽인다”라고 말했다(존 머터, 2020). 2010년 아이티에서 발생한 대지진,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도시 침수가 광범위하게 벌어진 미국 뉴올리언즈 등을 추적하며 재난의 단면을 저 문장으로 갈무리한 것이다. 지진, 폭염, 폭우, 기상이변이 아니라 건물을 재난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은, 재난이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사회적 과정임을 설명하려는 노력이다. 사실 재난과 위기에 대한 논의에서 이러한 관점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재난이 사건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취약성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관점은 위기관리 및 안전 정책으로 이미 수용되어, 취약성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제도적으로 다루는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평등하지 않은 토대 위에서 발생하는 재난이 이제는 일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 평균 기온 상승 1.5° 의 경계는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은 이제 점차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은 이 경계가 무너지면 “복합적이고 동시적인 리스크가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IPCC, 2023). 열과 습도의 변화에 따른 건강문제, 식량의 생산 영향, 도시와 주거 인프라의 변화 등 위험 요소는 지역과 삶의 전반을 아우른다. 재난이 일상이 되고, 위기가 삶의 조건이 되는 상황에 대한 경고는 익숙해서 식상하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기후위기의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지난 2025년 영남 지역 산불은 한국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역대 최대 피해를 기록하며 2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10만 4,000ha에 달하는 피해가 기록되었다(한겨레신문, 2025). 산불이 발생하고 난 뒤 이재민이 된 주민들은 정부와 지자체에서 지원한 컨테이너형 임시주택에서 거주하고 있다. 산불이 지나가고 이재민들이 임시거처로 이동한 뒤, 폭염으로 인한 주민들의 건강피해를 염려하는 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지난 2019년에서 2023년까지 4년 여간 강원도 고성에서 삼척 일대의 산불 피해 기록에 따르면, 임시컨테이너 거주민들의 가장 큰 불안은 산불 이후 여름철 폭우가 불러올 수 있는 산사태이기도 했다(신하림, 2025).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지난 2008년과 2018년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다. 2018년 산불 이후, 세계적인 방송인이자 대부호로 꼽히는 킴 카사디안이 유명 토크쇼에 나와 캘리포니아 산불 경험을 이야기하며, 사설 소방관을 고용해 산불로부터 집을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뉴욕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소방관의 약 45%가 민간 소속인데, 이들은 계약직으로 정부의 산불 진압에 투입되거나 혹은 AIG, Chubb와 같은 대형 보험회사의 주택보험상품의 서비스 일환으로, 대부호들의 주택 보호를 위한 활동을 수행한다(Newyork times, 2025). 미국 언론은 캘리포니아의 대부호들이 사설 소방관을 고용하거나 물탱크 차량을 개별 계약하여 산불을 대비하는 계층적 격차를 보도하고, 이를 둘러싼 윤리적 논란을 전하곤 한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 한정된 인력과 자원, 용수는 어디에 먼저 지급되어야 하는가. 소득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집과 생명을 보호하는 방식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격차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자본주의가 첨병인 미국에서도 논란거리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내는 동안, 안전과 위험, 때로는 생과 사를 가르는 곳은 불평등과 격차라는 단어로 설명해야만 하는 때가 더 많아질 것이다. 기후위기를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누구의, 어떤 기준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과 사회를 바라보아야 할까. 이 질문으로 시작하려는 이야기는, 위기는 만연해졌으나 경고는 식상해져 버린 시대에 우리의 삶이 기존의 익숙함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언제까지 재난 피해를 두고 사고의 불가항력성, 피해의 불운을 이야기 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익숙한 삶의 경로가 불러온 만연한 위기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함께 감당해야 하며, 이를 위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선택지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여전히 그런 선택지는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선택이 아닐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는 있지만, 우리의 선택을 가로막는 현실적 불편함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일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위험하고 번거로운 일이고, 우리집에 태양광을 설치하는 것은 집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복잡한 협의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경제적 효과도 크지 않은 것 같다. 로컬푸드를 찾고, 동네의 작은 가게들에서 장을 보기에 노동시간은 너무 길고, 해야할 일이 많다. 그러므로, 배달앱을 켜서 플라스틱에 담긴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고, 재생에너지 설치는 남의 일로 여기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개인이 부지런을 떨며 찾아 다녀도 때때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봉착하거나, 거기에 상당한 노력과 돈과 시간을 써야하는 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를 걱정하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선택지들은 언제나 번거롭고, 비용이 들고, 부차적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과연 더 잘사는 나라, 더 많은 돈을 버는 기업들보다 기후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개인의 삶에서 많은 선택을 하고 삶을 바꿔낸다 하더라도, 기업과 정부가 더 책임있는 자세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은 허사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은 지금껏 나보다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기업과 정부, 그리고 다른 선진국이나 공장이 많은 나라에서 책임져야 하는 문제가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때때로 우리는 기업과 정부를 우리의 삶과 명백하게 분리하며 생각하지만, 우리는 기업이 만드는 물건을 소비하고 정부의 정책에 지지와 반대를 표하며 정부를 구성하는 투표권을 갖는다. 정부의 정책은 언제나 시민들의 인식을 크게 벗어나 추진되기 어렵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높은 사회에서 정부가 재생에너지를 강력하게 추진하기란 불가능하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금융지원이나 정책 지원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집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볼까 싶은 시민들은 백방으로 태양광 패널을 설치, 운영 전과정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 하나하나 적용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또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기 불편한 사회라면 정부 정책과 시장은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교통 체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 자전거는 여전히 부차적인 수단이 되고, 도로의 한 공간을 점유하는 자전거 도로를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안전하지 않은 자전거 이용 환경에서 시민들이 자전거를 탈 이유가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가장 익숙하고 편리한 지금까지와 같은 삶의 방식을 불편하게 봐야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러한 점에서 도넛도시 모델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긴 삶의 방식, 도시 시스템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도넛도시 모델이 지속적으로 묻는 것은,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그 도시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에 적절하게 구조화되어 있는가, 그리고 지금의 삶의 방식이 기후위기로부터 시민들의 삶을 과연 안전하게 지켜주기 충분한가이다.
이를 위해 도넛도시 모델은 두 가지의 중요한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의 삶, 경제, 사회가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 세계를 사는 시민들은 모두 꽤 안전하고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가이다. 우선 첫 번째 기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우리는 직관적으로 지구 시스템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산불은 매년 격해지고, 여름의 야외활동은 어느 순간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가뭄도 저 멀리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지 오래되었다. 매번 기상이변을 겪으며 우리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이야기 한다.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에 자리를 틀고 있는 ‘스톡홀름 복원력 센터(SRC, Stockholm Resilience Centre)’는 지난 2008년부터 지구 시스템의 건강성을 확인하는 9개 지표를 ‘행성 경계(Planetary boundaries)’로 제시하고 그 상태를 정량화하여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기후변화, 신규 화학물질, 오존층 파괴, 대기오염, 해양 산성화, 생물다양성, 생태순환, 수자원, 토양오염이다. 이 9개의 지표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지구 시스템이 물리적 한계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지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지구의 불안정성을 경고한다. 안타깝게도 지난 2025년 11월, 스톡홀름 복원력센터가 4번째 발표한 행성경계지표 평가에서는 총 7개 항목에서 안전범위를 벗어났으며 이는 지난 2009년 3개, 2023년 6개 항목이 안전한 상태를 벗어났다고 평가한 것보다 더 악화된 상황에 지구가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무리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구 시스템의 변화가 불가역적 상태에 들어서면 우리의 삶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구의 물리적 한계 안에서 사회경제를 재조직할 것.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강하게 반영한 정책적 명제가 한국 정부를 비롯한 전 세계 국가들이 추진하고 있는 탄소중립 정책이다. 2015년 파리에서 열린 기후변화당사국총회 이후 각 국가들은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탄소중립을 국가의 법정 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통해 전 세계는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온도의 1.5도를 가능한 지켜내자는 약속을 이행 중에 있다.
<그림 1> 스톡홀름 복원력 센터의 행성경계 지표

이를 위해 화석연료에 기댄 에너지원을 축소하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자 하며,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관리하고 규제하며, 자동차를 교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이것은 정부 정책이나 기업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삶의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민들의 삶을 일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시민들의 삶의 방식은 변화가 일률적인 것만큼이나 단조롭게 유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각기 제각각이고, 따라서 기후위기를 대응하기 위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각자의 삶이 처한 조건에 따라 그 방향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특히 기후위기라는 난제는 각자의 삶의 처지의 문제를 더 복잡하게 드러낸다. 각자가 사는 건물의 안전성 정도에 따라 지진을 다르게 겪는 것처럼, 각자의 삶의 처지가 어떠했는가가 위기의 순간 생사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재난이라는 사건 혹은 현상이 아니라 재난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주목을 요구한다. 이 차이는 기후위기의 피해만이 아니라 기후영향, 온실가스 배출량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2022년 세계적인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는 ‘탄소 배출량 1위 셀러브리티’로 선정되었다. 지속가능성에 대해 연구하는 기관인 미국의 야드는 스위프트가 2022년 1월부터 7월까지 170차례 전용기를 사용하며 8,293t의 탄소를 배출했다고 추산했다. 이는 한 사람당 연간 평균 탄소 배출의 약 1,000배에 해당한다(Yard Team, 2022). 옥스팜(2025)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5년 파리협약 이후 최상위 1%의 부자들은 하위 50%의 사람들보다 2배 이상의 탄소를 배출했으며, 1990년 이후로 보자면 하위 50%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3% 증가하는 동안 상위 0.1%는 32%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기후불평등과 계층적 격차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의 불균형성은 최근으로 올수록 국가 간격차보다는 국가 안에서 계층적 격차에 따라 그 규모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이른바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 격차가 더 컸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인도와 중국과 같은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시민들의 삶의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국가 간 경제적 격차는 줄어든 반면 사회 계층 간의 격차는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90년, 전 세계 탄소 불평등 62%가 국가 간 불평등이었으나, 2019년에는 탄소 불평등의 64%가 국가 내 불평등에 기인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Chancel, L., Bothe, P., Voituriez, T., 2023). 이는 한편으로 상위 10%의 부자들은 생활 양식을 조금만 바꿔도 온실가스 배출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용기 탑승 횟수를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소비와 투자의 방식을 바꿔내면 이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감축 규모는, 보통의 사람들이 줄일 수 있는 양을 훨씬 상회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삶이 기후위기 시대에 좋은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파이를 더 키워서, 부가 가난한 이들에게도 흘러넘치도록 하는 것이 평등이고 복지라던 기존의 경제성장 모델은 기후위기를 불러왔다. 파이를 더 크게 만들수록 기후위기가 가속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파이가 공정하게 사람들에게 분배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는 좋은 삶은 더 많은 부가 흘러넘치도록 만드는 성장주의 담론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이 전용기를 타고 하룻밤 사이에 태평양을 넘나드는 동안, 농촌의 한 마을에서는 비행기는 고사하고 대중교통을 타고 시장을 가거나 병원을 가는 것조차 점점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넛모델은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복지 정책과 지구평균 온도 상승을 제어하기 위한 기후 정책이 결합하여 새로운 관점을 도시 비전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세계가 불러온 불합리성, 불가능한 성장,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경제적 불평등은 개인과 사회의 탄소배출량의 격차를 만들고, 동시에 탄소배출을 충분히 하지 못해 발생하는 삶의 질 저하의 문제를 불러온다. 더 소비하지 못하는 삶은 온실가스를 덜 배출하지만, 동시에 기후위기에 가장 먼저 취약해질 수 있는 구조를 드러낸다. 기후위기 취약계층은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주거 조건을 만들기 위해 비용을 충분히 투여하기 어려우며, 이로 인해 기후재난으로 인한 영향을 더 크게 받고 재난의 경험 이후로는 일상으로 회복할 가능성이 더 낮아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개인의 경제적 역량에만 맡겨둔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기후위기를 대응하면서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지구의 평균온도 상승을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하며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할 때, 과연 그 책임의 크기가 모두에게 같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동시에 이는 기후위기 대응을 목표로 국가와 지방정부의 지원과 정책의 이익이 누구에게 가장 먼저 가 닿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계층별 책임이 다르고 동시에 기후위기로 인한 영향에 더 취약한 집단이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사회적 부담과 탄소중립을 위한 정책의 효과와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문제 앞에서 발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풍요로운 삶은 도대체 어떤 방식의 삶이어야 하는지, 동시에 좋은 삶의 기준을 어느 지점에 위치시켜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영국의 생태경제학자인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는 이 질문들에 대해 ‘도넛 모델’의 개념을 제시한다. ‘생태적 한계’를 바탕으로 ‘모든 시민이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간에서 살아가는 삶’이 우리 지역에서 구현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지, 사람들이 모여 그 기준을 새롭게 정립하고 정책의 방향을 만들어내야 할 것을 요청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사회의 작동 방식과 그 원리를 재구성하여 생태적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구조화해야 한다. 동시에 이 공간 안에서 사는 이들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 도시의 정책 목표로 수용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많은 소비를 하는 이들의 삶은 생태적 한계 안에서 운영되도록 조정하고, 지나치게 적은 소비로 인해 삶의 기초가 무너진 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공적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2. 사회적 기초를 지키며 생태적 한계 안에 사는 도넛 도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도시의 목표와 작동 원리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구성 내용과, 여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새로운 관점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도넛 모델은 국가나 지방정부, 도시가 자신들의 중장기 비전과 목표를 도넛모델에 기반하여 수립하기 위해 현재 자신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변화의 방향을 수립하여 이를 지역의 행동 전략으로 삼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아직 도넛 모델을 바탕으로 어떻게 도시의 현 상태를 점검하고 도시의 중장기 변화 전략을 만들어 내기 위해 도넛모델을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이 구체화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도넛모델을 도시 비전에 적용한 대표적 사례로 알려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영국 리즈, 벨기에 브뤼헤와 같은 도시들은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도넛모델을 통해 자신들의 도시를 점검하고 변화의 방향을 수립하기 위해 채택한 과정은 대체로 유사하다.
가장 먼저 현재 도시가 생태적 한계와 사회적 기초를 충분히 지키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이 점검을 위해 총 네 가지 렌즈로 지역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은 글로벌-사회, 글로벌-생태, 지역-사회, 지역-생태로 구분된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삶, 현재 도시의 삶의 지속가능성을 글로벌 차원과 지역적 차원에서 질문하며 사회적 요소와 생태적 요소를 점검하도록 한다. 도시민의 삶을 유지시키는 건물, 교통, 이동, 먹거리 등과 같은 물리적 요인들이 자신들의 도시 안팎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공급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영향이 사회적으로도 생태적으로도 윤리적인지를 확인한다. 또한 이러한 자원이 모두가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충분히 공급되고 있는지, 특정 집단에게 집중되어 공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도록 한다.
가령,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와 빵, 입는 옷들을 생산하는 그곳의 시민들은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간 안에 살고 있는가. 또한 그 물건들은 그 지역의 생태적 한계를 깨뜨리지 않는 조건에서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 글로벌 관점의 질문들이다. 동시에 이러한 자원을 충분히 소비할 수 없는 집단이 우리 지역사회 안에 존재한다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이유가 무엇인지를 점검하도록 한다. 이는 우리의 삶이 한정된 지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과, 기후위기를 불러온 삶의 양식이 글로벌 공급망 안에서 다른 도시 시민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함께 이해하도록 한다.
이러한 질문들을 도시의 지표들로 점검하고 수치화하는 것이 ‘도시의 도넛 초상화’ 그리기 작업이다. 연구자들은 도시의 다양한 정량지표 and 도시 비전 등을 점검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사회적 기초와 생태적 과잉의 상태를 확인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재 도시가 생태적 한계를 넘어서거나 사회적 기초를 갖추지 못하도록 만드는 구조적 요인을 점검하고 이를 도시의 변화로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도넛 초상화를 만드는 과정은 도시의 핵심 이해당사자들이 공동으로 도시의 현 상태를 이해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면서도 시민들에게 충분한 삶의 요건을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도넛 초상화를 통해 도출된 도시의 사회적 ‘결핍’과 생태적 ‘과잉’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제거하여 모든 시민이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간’에서 삶을 살도록 도시 정책을 수립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림 2> Kathe raworth의 도넛모델 개념

1) 도넛의 세계에 먼저 들어선 도시들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은 지난 2022년 ‘암스테르담 순환 경제 실행 과제 2023-2026 (Implementation Agenda for a Circular Amsterdam 2023-2026)’를 발표했다. 2050년까지 100% 순환경제 도시 달성을 목표로 하는 이 전략은, 도시의 온실가스 배출과 생물다양성에 대한 인간의 영향을 줄이고, 삶의 질을 증대하는 것과 함께 순환경제 달성을 통해 원자재 수급의 안정성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시는 도시의 순환경제전략을 발표하며 그 배경으로 도넛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경험하면서 암스테르담은 지역사회의 회복 필요성과 자원이용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의 중요성이 확인되었다. 전쟁과 팬데믹으로 인해 국제 자원 공급망에 변동이 생기고, 이것이 시민들의 삶의 불안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하는 세계적 조건 속에서 암스테르담은 도시의 회복과 복원의 방향으로 생태적 한계 안에서 시민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순환경제 전략은, 도시의 자원 이용과 온실가스 배출 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계된 것이다. 도시를 작동시키는 시민들의 제품 구매와 먹거리 소비, 건축과 자원 이용은 네덜란드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폐기물은 가까이는 암스테르담 인근 도시로, 전자 폐기물은 아프리카 가나로, 그리고 의류폐기물은 남미 칠레로까지 내보내지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암스테르담의 소비와 운영이 하나의 국가와 도시를 넘어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며, 이 모든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배출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에 따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 구조 설계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림 3> 암스테르담 순환경제 계획안의 자원이용과 온실가스 배출 흐름

이러한 인식에 따라 암스테르담은 단순히 폐기물 배출의 분리수거와 폐기 과정의 고도화를 위한 정책을 만드는 것에서 한발 더 크게 나아간다. 2050년 100% 순환경제 달성을 위해 2030년 신규 원자재 사용량을 2020년 대비 50%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신규 소비재 구매를 줄이고 전자제품, 가구, 의류를 수리할 수 있는 생활 편의시설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헌 옷을 새로운 원단으로 만드는 기업을 지원하고, 기존 건축물의 자재를 다시 재사용할 수 있도록 건물 해체와 이용 시스템을 재구조화하고 있다. 먹거리의 경우 지역 내에서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로컬 푸드 정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공공연하게 네덜란드 정부나 유럽연합의 규제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도시 자체의 선도적인 실험을 통해 순환경제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내는 것을 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다.
2) 미국 포틀랜드
포틀랜드는 지난 2001년 처음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지역의 행동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기후대응 목표를 강화하고 지역의 삶의 조건을 고려하여 계획이 점차 발전하였는데, 2015년에 채택한 ‘2015 기후 행동계획(Climate Action Plan)’은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수립하고 도시의 각 영역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과 주요 특성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계획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포틀랜드시가 시민들이 도시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떤 형태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소비 기반 온실가스 배출 인벤토리’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소비 기반 온실가스 배출 인벤토리를 구체화하면서 포틀랜드시는 지역 내 시민들이 소득 격차에 따라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온실가스 배출을 지속시키는 구조적 요건들을 파악하여 도시 정부의 정책으로 이를 개입하고 조정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가령, 에너지효율등급이 낮은 주택은 시민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하고, 이에 따라 온실가스 배출량을 늘린다는 점에서 주택을 수리하여 단열을 개선하고 재생에너지를 설치할 수 있는 정책 프로그램을 포틀랜드시는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포틀랜드 지역의 녹색일자리를 확대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통해 지역 내 일자리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일자리를 통해 지역 시민들의 삶의 수준이 향상되도록 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포틀랜드시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면서도 사회적 형평성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캐나다 나나이모시, 영국 리즈시, 벨기에 브뤼헤시 등 다양한 도시에서 각 도시의 지역적 특성과 조건을 고려한 도넛 도시 모델이 만들어지고 있다. 도넛도시의 실험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과정과 전략을 채택하도록 하지만, 공통점 역시 확인된다.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던 도시가 외부화해 온 생태적, 사회적 영향을 인식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소비하는 제품이 만들어지고 폐기 하는 과정을 외부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윤리의 문제, 그리고 이 과정의 기후영향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도시 안에서 해결하기 위한 도시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가나로 넘어가던 전자 폐기물을 도시에서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쓰레기 매립장을 건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자제품 폐기 과정에서 사용가능한 물질을 다시 수집하고, 전자 제품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규제를 만들고 수리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폐기물 자체를 줄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낡고 오래된 주택을 부수고 새로 짓는 방식이 아니라, 지속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건물의 수명을 늘려 자원의 이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시민들의 일자리를 늘리고, 공동체가 회복되고 시민들의 삶의 질이 더 좋아질 수 있는 방법과 연계하도록 한다.
3. 도넛없이 도넛을 만들어내는 한국의 도시들
도시가 도넛의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간 안에서 운영된다면 시민들의 삶 역시 자연스럽게 생태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삶의 기초를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말은 언뜻 거창해 보이고, 대단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꾸려지는 삶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가 도넛의 안에 존재한다면 시민들은 자연스럽고 편리하게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도시에서는 태양광이 설치된 주택에 사는 것이나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고, 굳이 새로운 물건을 매번 사지 않아도 어디서나 내가 필요한 물건을 얻거나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시민들에게도 쉽고 만족할 만한 선택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한 도시의 실험은 한국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암스테르담이나 포틀랜드, 캘리포니아와 같은 도시들처럼 도시 전체를 도넛모델로 조망하고 도시의 새로운 전략을 중장기적으로 채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시민들의 질을 높이면서 생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가령 전라북도 완주군의 로컬푸드 매장에 가보자. 하나로마트 일층에 꽤 큰 규모로 운영되고 있는 로컬마트를 통해 일주일의 식사를 차리는 데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로컬푸드는 아이스크림에서 치즈, 된장과 간식거리, 육가공품, 반찬, 심지어 꽃까지 다양하다. 손에 꼽히는 품종이 아니라, 야채부터 가공 식품까지 어지간한 식재료는 다 구할 수 있다. 완주군은 로컬푸드 정책을 지난 2008년부터 시작하며 지역의 고령 소농의 소득을 증대하고 청년들의 귀촌을 촉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완주군은 농업 자원과 먹거리 수요처를 조사하고, 소농들이 큰 자본 투자없이 사용할 수 있는 가공센터, 공동 선별장 등의 농업 인프라를 구성했다. 또한 군 차원에서 여성농과 청년농을 위한 전용 기금 조성과 교육을 추진하고, 이들이 생산하는 제품이 품질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연계했다. 이를 통해 농가에는 수익이 직접적으로 연계되도록 하고, 지역은 로컬푸드 정책을 통해 활성화되며 지역 일자리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광역적 차원에서는 코로나와 같은 위기가 발생해도 먹거리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함으로써 먹거리 안전성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경기도 파주시는 지자체가 직접 재생에너지 발전소를 설치해서 이를 지역의 중소기업에 연계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들도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하는 RE100의 필요성이 요구되지만 재생에너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지자체가 나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재생에너지를 비교적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공급받고, 지자체는 지역의 공공부지를 활용하여 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 과정은 지역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시민들의 일자리를 안정화하면서 지역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특히 지역 안에서 재생에너지를 통한 발전과 유통·소비의 과정을 공공성에 기반하여 연결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통상 서울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대중교통이 체계화되어 있어 이용의 편리함이 높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생활권 안에서의 대중교통 이용이 누구에게나 편리한 것은 아니다. 마을버스 배차간격이 긴 지역,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려면 한참 시간이 걸리거나 높은 언덕이 있어 불편함이 있는 지역이 꽤 된다. 마을버스 배차 간격이 길고 편의성이 떨어지면 어르신들이나 어린이 등 교통약자는 이동에 어려움을 겪지만, 민간 운수 업체들은 수익성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충분한 교통편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서울시 성동구는 ‘성공버스’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공공이 직접 운영하는 셔틀버스 형태로 지하철역, 구청, 보건소 등을 연계하되 기존 민간업체와 노선이 중복되지 않도록 조정했다. 지난 2024년부터 시작된 성공버스는 주민들의 편의를 높이기 위해 배차간격을 철저히 지키고, 안전운전을 강화함으로써 시민들의 편의 and 안전을 높이고 있다. 오히려 성공버스가 마을버스의 이용률을 함께 끌어올리고 있다. 성공버스를 통해 시민들이 대중교통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반적인 교통편의를 개선하는 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경기도 광명시의 철산 어린이집은 국토교통부가 지난 2020년부터 추진한 공공 건축물 그린리모델링의 첫 사례이다. 1999년 준공되어 노후화된 시설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대대적인 그린리모델링을 추진했는데, 이는 창호나 조명의 교체 수준을 넘어 단열재 시공, 폐열회수장치, 고효율 냉난방 장치 및 조명, 태양광 발전설비 등을 설치했다. 그린리모델링 이후 철산 어린이집의 1차 에너지소요량이 기존 264.7 kWh/m² year에서 31.7 kWh/m² year로 낮아져 88%의 1차 에너지 사용량 감축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냉난방비는 78% 감축되어 연간 520만 원을 절감하였으며, 재생에너지 설비를 통해 70~80% 정도의 에너지 자립률을 달성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운영하는 시청, 동사무소, 어린이집, 도서관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공공시설은 시민들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시민들의 일상 및 삶의 쾌적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공공간의 탄소중립은 온실가스 감축의 의미를 넘어 공공시설을 통한 사회적 가치를 담아낸다. 공공공간을 통해 시민들에게 한 단계 더 높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시민들은 경제적 부담 없이도 여가와 생활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추진되고 있는 전라북도 전주시와 충청북도 증평군의 도서관 정책은 그야말로 시민들의 거실을 넓히는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계절의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고, 다양한 문화행사와 정보를 얻으며, 편하게 쉬고 놀고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도시 곳곳에 조성함으로써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건물 리모델링이 LED, 창호 및 보일러 교체 등 한정된 범위를 넘어서 시민들의 생활과 여유, 놀이의 방식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연계될 수 있다. 이는 시민들의 삶의 기초를 강화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도시민들의 사회적 기초는 먹고 자고 이동하는 것만으로 갖춰지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도, 문화, 교육, 여가의 서비스를 공적 공간 안에서 누리고, 자동차가 없어도 어디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으며,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등 삶의 다층적 욕구를 함께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기후에 도움이 되면서도 삶 역시 충분히 풍요로울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공공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대대적으로 도넛도시를 표방하며, 도시 전체의 변화를 조망하거나 전략을 수립한 지역이 한국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실험들은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은 자원의 이용을 전제하는 방식이 아닌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이를 통해 환경적 영향 역시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는 도시의 변화를 개인의 의지에 맡기지 않고 도시의 정책을 통해 시민들이 움직이고 생활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4. 도넛 모델을 통해 지역의 전환을 상상하기
한국의 정부와 도시에서는 기후정책을 추진하면서도, 한쪽에서는 지역마다 공항을 짓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거나, 대규모 개발계획과 탄소집약적 프로젝트가 동시에 추진되어 기후정책과 복지 정책이 통합되어 도시의 핵심 정책 과제로 추진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전히 지역의 에너지 전환은 환경정책이나 기후 정책으로 한정되어 사고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이 복지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으로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지는 않다.
향후 2년 이내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이 1.5℃를 넘어설 것이라는 예측이 발표되는 상황에서 기후대응이 국가와 도시 정책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정권이 바뀌면서 에너지 및 산업 전환 정책 추진,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재생에너지 기반 농어촌 소득 확대 전략이 국가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이 국가에서 광역, 기초자치단체까지 완성되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사회가 추진하는 기후위기 대응이 시민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개선하고 있는지, 공공정책의 변화를 통해 도시의 작동 방식과 시민들의 삶의 양식을 바꿔내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이를 다시 말하면 도넛 도시의 맥락에서 지역의 에너지 전환과 복지 정책을 통합하는 시도가 충분한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도시의 도넛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시민들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들이 거의 모두 복지와 생태 이슈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의 먹거리는 복지의 가장 기본 이슈이자 건강과 직결된 사안이다. 주거는 시민들의 복지의 질을 좌우하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자산형성의 수단으로 작동하면서 주택의 노후화를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재개발·재건축을 추동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주거복지와 온실가스 감축을 동시에 이를 수 있는 그린리모델링은 여전히 주택정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교통 역시 마찬가지다. 자가용 중심의 교통 정책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면서도 시민들의 이동성을 높일 수 있는 교통 정책과 충돌하기도 한다. 탄소집약적 에너지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재생에너지의 대폭적 확대와 난방의 탈탄소 전략이 수립되어야 하나, 정책적 진전은 빠르게 이뤄지고 있지 못하다. 도넛 모델의 적용은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복지 정책이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도시 목표와 전략을 상상하고 실행하도록 만든다. 가장 빠르게 도넛 모델을 적용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순환도시의 비전을 건축, 교통, 소비재와 먹거리 등 도시 정책 전반에 적용하고, 따뜻하고 시원한 주거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앞서 소개한 한국 도시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새로운 도시 정책의 실험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책들이 한번의 실험, 특정 지역의 성과로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도시 정책의 방향의 이정표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논의해야 한다. 이 방향이 한국의 조건과 상황에 맞는 도넛 도시의 비전이 될 것이다. 이것이 기후위기를 대응하며 기후위기를 살아야 하는 도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